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드리드, 1808년 5월 3일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808년, [[이베리아 반도 전쟁|나폴레옹은 에스파냐를 침공]]했다. 나폴레옹이 내세운 명분은 에스파냐 민중들의 해방이었으나 기실은 [[대륙봉쇄령]]을 지키지 않는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가운데 아예 에스파냐까지 정복해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합하자는 나폴레옹의 계산에 따라 이뤄진 전쟁이었다. 국왕 [[카를로스 4세]]와 재상 고도이의 학정에 시달리던 에스파냐 민중들은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 반겼으나 곧이어 나폴레옹의 [[원수(계급)|원수]] [[조아킴 뮈라]]가 이 기회를 통해 카를로스 4세, 왕세자 페르난도를 모두 망명시키고 자신이 에스파냐의 왕이 되려고 하자 에스파냐 민중들의 프랑스군에 갖는 호의는 순식간에 적의로 돌변하게 된다. 결국 1808년 5월 2일, [[마드리드]]에서 대규모 반프랑스 시위인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도스_데_마요_봉기|도스 데 마요 봉기]][* 고야는 이 시위를 그린 <마드리드, 1808년 '''5월 2일'''> 이라는 작품도 그렸으며, 이 작품에는 <5월 3일>에 등장하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등장한다. 아마 시위의 주동자라서 처형당한 듯.]가 열렸고 뮈라 휘하의 프랑스군은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마드리드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다. 고야의 이 그림은 5월 3일 새벽에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벌어진 프랑스군의 양민학살을 그리고 있다. 정작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 조아킴 뮈라는 에스파냐 왕이 되지 못한다. 에스파냐 민심의 이반을 걱정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[[조제프 보나파르트]]를 [[호세 1세]]로 에스파냐 국왕에 봉했으며, 대신 뮈라는 나폴리 국왕에 봉해진다. 그러나 에스파냐 민중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지지하던 페르난도 왕세자가 왕이 되지 못한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으며, 이 결과로 [[이베리아 반도 전쟁]]이 촉발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